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미니 리뷰

Retina-Ready: 이 포스트는 아이패드 레티나 디스플레이와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에 최적화된 포스트입니다.

내가 첫 맥인 15인치 맥북 프로를 산 지도 4년을 넘어 5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맥북 프로가 유지바디 디자인을 채택하기도 전인 2.4GHz 코어2듀오, 기본 2GB RAM(이후에 따로 4GB로 업그레이드), 200GB의 하드 드라이브(이것도 500GB로 힘겹게 업그레이드) 등을 장착한 2008년형 초기형인 이 노트북은 아직까지도 준수한 성능을 보이며 지금껏 내가 쓴 여느 디바이스보다도 훨씬 오래 썼다. (이에 필적할만한 녀석은 내 메인 카메라인 니콘 D300밖에 없다) 그 전에 소니 노트북 두 대를 써봤지만, 모두 그닥 인상적이지 않은 퍼포먼스 때문에 많은 실망을 안겼었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음 컴퓨터도 맥을 고민하게 된다. 물론, 내가 내 맥북 프로를 애지중지하면서 사용한 4년동안 컴퓨터 세상도 스마트폰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이 변했다. 코어가 그새 두 배로 늘었고, 램은 내 맥북 프로가 왔을 때 가지고 있던 용량의 4배의 카운트가 기본으로 들어가는 시대가 됐다. 그래픽 메모리도 1GB를 넘나들고, (내 맥북 프로는 256MB다) 하드 드라이브 대신 플래시 메모리를 선택하는 제품들이 속속 나오고 있고, 이 둘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드라이브의 개념도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맥 얘기로 돌아와서, 처음에 내가 고려했던 제품은 맥 미니였다. 모니터만 구해놓으면 맥북 프로보다도 더 휴대성이 좋았고, (내가 노트북을 산 이유는 유학생이라는 입장에서 한국과 미국을 다니며 휴대하기 편한 컴퓨터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가격도 쌌다. 그러나 그 생각은 6월에 완전히 뒤바뀌였다.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나오면서다. 그리고 이제는 15인치냐, 13인치냐로 주변 사람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미 난 마음을 정한 지 백만년이지만, 13인치와 15인치 모델을 찬찬히 뜯어보도록 하자.

양쪽에 새롭게 뚫은 흡입구.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줄여서 레티나 맥북 프로)가 특별한 것은 그저 레티나 디스플레이 뿐만 아니다. (물론 그게 크긴 하다) 레티나 맥북 프로를 출시하면서 애플은 유니바디 맥북 프로 출시 4년만에 섀시 디자인도 뜯어고쳤다. 겉으로만 보면 유니바디 디자인과 유사하지만, 몇몇 차이점이 보인다. 먼저, 얇고 가벼워졌다. 기존 13인치 맥북 프로에 비해 13인치 레티나 맥북 프로는 약 5mm 정도 얇아졌고, 무게도 400g 이상 가벼워져 1.62kg라는 초경량을 자랑한다. (13인치 맥북 에어와는 300g 차이다) 더 작은 크기와 경량화를 위해 내부 구조는 외부에 비해 대규모 수술을 거쳤다. 배터리가 내부 구조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면적 최소화를 위해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광학 드라이브 등은 아예 빼버렸다. (물론, 요즘 많이 파는 USB 호환 외장 드라이브를 쓸 수 있다) RAM이나 플래시 메모리는 아예 보드로 박아넣어 사용자가 임의로 업그레이드할 수 없다. (플래시 메모리는 슬롯 형태라 업그레이드가 가능하기는 하나, 쉽지도 않고 이를 어찌해서 분해해 업그레이드한다 하더라도 워런티가 깨진다) 이는 그만큼 공간 배분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애플의 통제를 향한 열망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는 일반 사용자들이 업그레이드같은 생각 없이 쓰는 맥북 에어 등과 달리 사람들이 오래 쓰다가 업그레이드도 할 수 있는 프로 라인업을 생각해볼 때 의아하기도 하다.

15인치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의 내부 구조. (출처: iFixit)

하지만 이렇게 통제를 통해 설계된 레티나 맥북 프로의 내부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아래 부분에 거대한 배터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애플은 내부 구조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넓이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 이미 아이폰 등에 내장형 배터리를 채택했고, 이내 노트북에서도 탈착식 매커니즘을 빼버렸다) 위에는 한치의 오차없이 치밀하게 설계된 냉각 시스템과 메인보드가 자리잡고 있다. 두 개의 팬은 비대칭형으로 계속 같은 주파수로 팬소리가 나는 것을 차단해 소음이 낮은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화면과 메인보드 및 키보드를 잇는 경첩 부분에 공기의 흡입구 및 배출구를 모두 위치시켰던 전세대와 달리 이제는 메인보드 및 키보드 쪽에 흡입구를, 경첩에 배출구를 내는 구조로 바귀어 공기의 흐름을 좀 더 효율적으로 배치시켰다. 스티브 잡스는 첫 매킨토시를 디자인할 때, 사용자들이 내부를 볼 일이 없더라도 내부 디자인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믿었다. 잡스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레티나 맥북 프로는 그의 디테일에 대한 집중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13인치 (왼쪽), 15인치 (오른쪽)

레티나 맥북 프로의 외장을 살펴보면, 키보드는 예전 맥북 프로와 거의 비슷한 구성이다. 다만 맥북 에어와 같이 예전에 광학 드라이브 추출 버튼이 있던 자리에는 전원 버튼이 들어갔다. 섀시의 얇은 두께 덕에 키보드 자체는 전 모델보다 들어가는 깊이가 많이 얉아졌다. 왼쪽에는 매그세이프 2 충전단자와 USB 3.0 단자, 썬더볼트 단자 두 개, 이어폰 단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다른 USB 3.0 단자와 SD카드 슬롯, 그리고 맥북 중 최초로 HDMI 단자도 들어갔다. 남은 배터리 잔량을 보여주는 표시기가 사라진 것은 아쉽다.

전체적인 빌드는 예전 유니바디 맥북 프로보다도 더 단단한 듯하다. 좀 더 밀도있는 패키지랄까. 무게도 확실히 내 맥북 프로와 비교할 때, 정말로 가벼운 게 느껴진다. 이것은 중요하다. 나같은 경우 가끔씩 수업에 아이패드 대신 노트북을 챙겨야할 때가 이따금씩 꼭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에게 레티나 맥북 프로는 에어만큼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휴대성을 제공한다.

기존 15인치 맥북 프로에서 찍은 갈무리 사진.
… 그리고 같은 페이지를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에서 봤을 때 갈무리 사진.
(클릭하면 확실해진다)

 이제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살펴보자. 13인치던 15인치던, 화면은 공통적으로 화려하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처음 탑재한 아이폰 4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아이패드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봤을 때의 충격때문에 이제는 적응이 될 법도 하건만, 레티나 맥북 프로의 충격은 또다시 신선하다. 소니 바이오 Z같이 13.3인치 노트북에 풀HD (1920×1080) 화면을 박은 일은 있더라도, (솔직히 이 노트북은 레티나 맥북 프로같이 스케일링을 하는 게 아니라서 텍스트가 너무 작아 읽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화면의 총 화소 수가 400만개를 넘어가는 것은 레티나 맥북 프로가 처음이다. 13인치는 2560×1600, 15인치는 2880×1800의 해상도를 가지고 있는데, 애플은 기존 맥북 프로들의 해상도를 4배로 뻥튀기하는 식으로 이 광활한 해상도를 이용한다. (즉, 기본 세팅에서는 13인치는 1280×800, 15인치는 1440×900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다만 훨씬 선명해보일 뿐) 이는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기본 레티나 스케일링 해상도 (1440×900)
레티나 다운스케일 해상도 (1680×1050)
레티나 다운스케일 해상도 (1920×1200)

흥미로운 것은 레티나 맥북 프로가 이보다 더 높은 스케일링된 해상도도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내는 방식 또한 흥미로운데, 애플은 이 높은 해상도를 각 화면의 해상도에 맞게 업스케일링을 하지 않고 대신 역시나 4배로 뻥튀기시킨 다음, 다운스케일링을 시켜버림으로써 끊임없는 ‘레티나 화질’을 실현시킨다. 다만, 사진이나 동영상 등은 업스케일이나 다운스케일을 시키지 않은, 원 해상도 그대로를 보여준다. (애플은 15인치 기준에서 볼 때, 파이널 컷 프로에서 옆에 보이는 동영상이 실제로 1080p 크기라고 말한다) 물론 다운스케일링을 시켰기 때문에 원 해상도만큼 화질이 높지는 않지만, 애플이 이를 지원하기 위해 OS X에 새로 쓴 스케일링 알고리즘 덕분에 화질 열화를 최소화시킨다.

사실 애플은 이 레티나 디스플레이로 인한 이미지 등의 화질 열화에 대해 상당한 신경을 쓴다. 이는 다운스케일에도 중요하지만, 아직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지원하지 않는 애플리케이션이나 특히 웹페이지의 이미지 요소를 업스케일할 때 또한 중요하다. 잘못하면 이미지가 상당히 깨져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아닌 일반 화면만도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실제로 아이폰 4가 처음 나왔을 때 거의 모든 웹페이지의 이미지들이 더 작은 화면에 맞춰져있어 깨져보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사실인데, 이도 고해상도의 화면을 탑재한 스마트폰이 시장에 풀리면서 개선되고 있다. 레티나 맥북 프로같은 경우도 상황은 유사하다. 아니, 더 심하다. 아직도 많은 웹사이트들이 (레티나 맥북 프로와 비교하면) 저해상도를 위해 개발된 페이지들이라 낮은 해상도의 이미지가 많으며, 일부 블로그 서비스 업체들은 사진 등을 원 해상도가 아닌 가로 640픽셀 정도로 리사이즈하여 올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이렇게 될 경우 레티나 맥북 프로에서는 화질열화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아이폰 4가 그랬던 것처럼 차차 해결될 것으라고는 보지만, 고가로 인해 예상되는 레티나 맥북 프로의 낮은 보급율을 생각할 때, 상당히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아이패드 레티나 디스플레이도 이 문제에 해당된다는 점이겠다)

그럼 성능은 어떨까?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아이패드가 자원난으로 고생(이는 8개월만에 새로운 A6X 프로세서를 탑재한 4세대를 내놓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됐을 게 뻔하다)을 꽤 한데 반해, 레티나 맥북 프로는 여유가 있어보인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아이패드같은 경우 일반 소비자용 제품이라 단가를 신경써야 했지만, 레티나 맥북 프로는 고급형 제품이라 (아직 기존 화면을 그대로 탑재한 맥북 프로도 판매중이다) 부품 선택에 좀 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소한 15인치 모델은 최고의 사양을 가지고 있다. 2.3GHz에서 최대 2.7GHz까지의 쿼드코어 인텔 코어 i7 프로세서를 선택할 수 있고, 8GB RAM에 256GB 플래시 메모리, 그리고 1GB 메모리를 가진 엔비디아 GT 650M 그래픽 프로세서를 탑재했다. 여기서 RAM은 16GB, 그리고 플래시 메모리는 768GB까지 늘릴 수 있다. (물론, 다 최고급 사양으로 채웠다간 가격이 곱절이 된다)

문제는 13인치 모델이다. 애플은 다양한 문제로 13인치 모델에서 일부 고급 사양을 포기해야 했다. 프로세서도 듀얼코어로 제한해야 했으며, 15인치에는 있는 외장형 그래픽 프로세서도 뺐다. (15인치는 내장형과 외장형 둘 다 탑재되어 사용함에 따라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그래픽 프로세서를 바꿀 수 있다) 아난드텍에 따르면, 13인치의 제한적인 전원 보급으로 돌릴 수 있는 쿼드코어 프로세서는 듀얼코어에 비해 70%는 더 비쌌을 것이며, (이 말은 결국 소비자 가격도 동반상승한다는 의미다) 외장형 그래픽 프로세서를 넣었다간 배터리르 넣을 공간이 부족해져 배터리 수명이 축소됐을 가능성이 크기에 애플로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최소한 일반적 컴퓨팅에서의 성능차는 놀랍게도 크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시스템 속도는 빠릿빠릿하다. 부팅 속도도 SSD 덕에 상당히 빠르며, 다양한 무거운 작업의 멀티태스킹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낸다. (더 버지에서는 개라지밴드와 파이널 컷 프로, 그리고 1080p 아이언맨 3 예고편을 13인치 모델에서 동시에 돌려버리는 실험도 했는데, 어떠한 성능 저하도 없었다고 한다) 이는 대부분 OS X 최적화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씩 사파리 등에서 스크롤링을 할 때 버벅임이 발견된다는 것은 문제다. 일부 컨텐츠가 많은 사이트에서 위아래로 스크롤링하다가 상당한 프레임 속도 저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13인치뿐만 아니라 15인치에서도 나타났다.

13인치 모델에서 외장형 그래픽 프로세서가 빠지면서 생기는 문제점은 게이밍이다. 아무리 인텔 HD 4000 내장 그래픽 가속기가 옛날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픽 ‘감속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내장 그래픽 칩셋으로 게이밍은 무리라는 것.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다.

레티나 맥북 프로는 모든면에서 맥북 라인 뿐만 아니라, 미래의 노트북이 어떻게 진화할 지 보여주는 청사진이고, 차로 치면 첨단 기술이 집목된 컨셉트카같은 제품이다. (컨셉트카와 다른 것이 있다면, 얘네들은 실제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격이 비싸고, (특히 i환율이 적용되니까 정말 홍콩같은 곳에서 사오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노트북의 다른 부분이 못 받쳐주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레티나 맥북 프로를 통해 애플은 노트북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게 될 지 방향을 제시한다. 스티브 잡스는 가고 없지만, 레티나 맥북 프로에는 잡스의 정신이 깃들여있다.

Score: 9/10

P.S) 13인치냐 15인치냐에 대한 답은, 물론 15인치이다. 13인치는 사진 등의 작업을 하기에는 개인적으로 많이 작고, 거기에 외장 그래픽 프로세서가 없다는 게 좀 크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당연히) 13인치가 훨씬 더 많이 팔릴 것 같다.

 

스카이폴 리뷰

제목: 007 스카이폴 Skyfall
감독: 샘 멘데스
주연: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주디 덴치 (M), 하비에르 바르뎀 (실바), 나오미 해리스 (이브)
러닝타임: 143분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와 그의 표적이 기차 위에서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기차는 터널을 나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본드의 동료인 이브(나오미 해리스)는 길의 끝에서 소총을 가지고 조준을 한다. 기차가 워낙 빨리 움직이고 있는 데다가 둘이 얽혀있어 쏠 수가 없다. 하지만 무전기에서 MI6의 수장 M(주디 덴치)은 그냥 쏴버리라고 소리친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방아쇠를 당긴다. 보통 다른 액션 영화였다면, 악당이 총을 맞고 이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총에 맞은 사람은 다름아닌 본드였다.

위 문단은 스카이폴의 오프닝 시퀀스다. 이 장면은 스카이폴의 전체적 방향을 암시한다. 기존 007 영화와 같으면서도 결국은 뭔가 다른, 올드팬들에 대한 오마쥬가 있지만 신선한 시도는 계속 되는, 그런 영화가 스카이폴이다.

스카이폴이 다른 007 영화들과 상당히 다른 점은 스토리의 초점에서 시작한다. 기존 007 시리즈라 하면, 각각의 액션 장면이 스토리를 이끈다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스카이폴은 드라마가 스토리의 뼈대가 된다. 영화는 M의 과거, 본드와 M의 관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세계의 정세 등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 액션을 곁들인다. 이로 인해 제이슨 본 시리즈나 최근 본드 영화들(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가 된 이후로 개봉한 카지노 로얄이나 퀀텀 오브 솔러스)같은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셨던 분들에게는 적잖은 실망이 됐을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영화를 보기 전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대부분 액션 장면이 많이 없어서 지루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이야기적 짜임새나 이 사이사이에 배치된 짧지만 큰 액션 장면들이 잘 배합되어 오히려 지겹지 않았다. 이는 물론 내가 스카이폴이 드라마적 내용이 중점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예측을 미리 한 덕이기도 하다. 즉, 애초에 보기 전에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인 듯하다. 그러나 너무 위에 기술한 전반 시퀀스가 너무 강렬해 이후의 장면들을 묻는 감은 없지않아 있다.

영화 자체는 시리즈의 전통과 (시리즈의 관점에서) 획기적 진행을 많이 섞는다. 아니, 전통이라는 말보다는 오마쥬라는 말이 더 맞겠다. 기관총을 쏘는 애스턴 마틴, 계속 쌓이는 본드의 마일리지(?) 등 마치 샘 멘데스 감독이 ‘옛날 007 영화들. 그땐 그랬지’라고 보여주는 것 같다. 멘데스 감독은 거기에 007 영화들로서는 다양한 신선한 시도를 한다. 영화의 거의 반이 영국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점과, 마지막에 저택에서 최후의 결투를 준비하는 본드와 M의 모습은 마치 서부극의 한 장면같다. (솔직히, 나는 나홀로 집에와 NCIS 시즌 5에서 셰퍼드 국장이 사망하는 장면 등이 더 떠오르더라)

영화를 보다보면, 제작진이 꼭 자아성찰을 하는 듯한 장면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스카이폴의 시점에서 이미 본드는 다양한 임무를 뛴 베테랑이고,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는 갓 007이 된 신참이었던지라 개연성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분들도 많은데, 이는 어차피 007 시리즈가 개연성은 이미 몇십 년전에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려 다 썩어 없어졌기 때문에 그닥 큰 문제는 안된다) 그와 M은 이제 MI6를 목표로 한 사이버 공격에 무력하게 당할 정도로 구식이 되었다. 온갖 컴퓨터 용어(의외로 많이 나온다)를 내뱉는 M의 비서 태너와 젊은 Q(흥미로운 것은, Q를 연기한 벤 위쇼는 엄청난 기계치라는 사실)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거나, 기밀 유출로 청문회에 소집된 M에게 국방부 장관이 “이제 잠입 요원에게 정보를 수집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는 장면 등은 꼭 시리즈 자체에 대한 자아성찰인 것만 같다.

스카이폴에는 나오미 해리스와 베레니스 말로히 두 명의 본드걸이 나오는데, 오히려 이 영화의 진정한 본드걸은 최고령 기록을 갈아치우신(?) 주디 덴치가 맡은 M이라 할 수 있다. 스카이폴은 어느 007 영화보다도 그냥 주변 인물에 불과했던 M을 거의 주인공급으로 비중을 높였다. 이로 그간 다뤄지지 않았던 본드와 M의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룬다. M을 노리는 실바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도 명연기를 펼친다. 여느 본드 악당과는 달리 M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좀 더 소박하지만, 현실적인 악역으로 그려졌다. M을 향한 광기나 이를 위해서라면 MI6 사이버 및 폭발 테러, 지하철 폭탄 테러 등 정말 뭐든 하는 성격 등은 정말로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좀 닮은 구석이 있다. 그 외에도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볼드모트로 분했던 랄프 파인즈가 SAS 출신 정보 위원회장으로 나와 호연을 했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스토리의 모든 면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페이스 빠른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 중반부가 느려지는 감은 없지않아 있고, 후반부로 가서 페이스가 빨라지다보니 약간의 스토리적 개연성을 포기하는 부분, 그리고 실바가 M에게 원한을 가진 이유 등도 너무 간단하게 몇 분 정도만 언급될 뿐, 좀 더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점 등은 아쉬웠다.

액션 장면이 좀 적긴 하더라도, 스카이폴은 볼거리가 충만하다. 특히 장면장면이 내 아이패드나 맥의 배경화면으로 쓰고 싶을 정도로 멋진데, 그 중 아주 밝은 곳을 배경으로 보이는 본드의 실루엣을 담은 다양한 장면들은 참으로 멋지다는 말밖에는 안 나온다. 그리고 제이슨 본이나 심지어 전작인 퀀텀 오브 솔러스도 가까이서 짧은 샷으로 정신없이 카메라 흔들어대면서(…) 현장감 있는 격투 장면을 찍는 경우가 많았는데, 스카이폴은 좀 더 느리고, 샷 하나하나도 길게 나오는 편이다. 이따금씩은 몰입도를 과도하게 떨어뜨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으나, 이런 차별성들이 나름 좋았다. 아델의 주제곡 Skyfall이 흐르는 오프닝 크레딧 또한 말을 안할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여자들이 나오는 007 오프닝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카지노 로얄의 오프닝 크레딧을 제일 좋아했으나, 이번 스카이폴이 그걸 바로 갈아치웠다. 그정도로 강렬했다.

사실 스카이폴을 보기 전에 포스트 준비 관계로 내가 2012년에 본 영화들 중 Top 5를 미리 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은 스카이폴이 이 순위 리스트에 난입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워낙 주변 평도 좋았으니까. (솔직히, 난입하기를 바랬던 것도 없지않아 있다) 예상대로, 스카이폴은 이를 난입했다. 그것도 상위권에.

올해로 007 시리즈는 50주년을 맞았다. 스카이폴에서 본드와 M은 시종일관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들이 믿는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이는 시리즈 자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다. 50년이라는 시간동안 007 시리즈의 영화들 23편이 나오면서, 세상은 변했다. 특히 세계 정세가 변했다. 시리즈 초기에 본드의 주적이었던 소련 등의 사상의 적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그 빈 자리를 국가적 크기가 아닌 단체적 크기의 테러리스트들이 메꾸고 있다. 실제로 요즘에는 007같은 첩보 요원들이 필요없는 것만 같다. 그와 함께 007 시리즈도 한물이 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카이폴을 통해, 질문은 던져진다. “과연 정말로 필요없는 것일까? 정말로 한물간 걸까?”

Score: 9.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