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007 스카이폴 Skyfall
감독: 샘 멘데스
주연: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주디 덴치 (M), 하비에르 바르뎀 (실바), 나오미 해리스 (이브)
러닝타임: 143분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와 그의 표적이 기차 위에서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기차는 터널을 나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본드의 동료인 이브(나오미 해리스)는 길의 끝에서 소총을 가지고 조준을 한다. 기차가 워낙 빨리 움직이고 있는 데다가 둘이 얽혀있어 쏠 수가 없다. 하지만 무전기에서 MI6의 수장 M(주디 덴치)은 그냥 쏴버리라고 소리친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방아쇠를 당긴다. 보통 다른 액션 영화였다면, 악당이 총을 맞고 이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총에 맞은 사람은 다름아닌 본드였다.
위 문단은 스카이폴의 오프닝 시퀀스다. 이 장면은 스카이폴의 전체적 방향을 암시한다. 기존 007 영화와 같으면서도 결국은 뭔가 다른, 올드팬들에 대한 오마쥬가 있지만 신선한 시도는 계속 되는, 그런 영화가 스카이폴이다.
스카이폴이 다른 007 영화들과 상당히 다른 점은 스토리의 초점에서 시작한다. 기존 007 시리즈라 하면, 각각의 액션 장면이 스토리를 이끈다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스카이폴은 드라마가 스토리의 뼈대가 된다. 영화는 M의 과거, 본드와 M의 관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세계의 정세 등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 액션을 곁들인다. 이로 인해 제이슨 본 시리즈나 최근 본드 영화들(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가 된 이후로 개봉한 카지노 로얄이나 퀀텀 오브 솔러스)같은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셨던 분들에게는 적잖은 실망이 됐을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영화를 보기 전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대부분 액션 장면이 많이 없어서 지루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이야기적 짜임새나 이 사이사이에 배치된 짧지만 큰 액션 장면들이 잘 배합되어 오히려 지겹지 않았다. 이는 물론 내가 스카이폴이 드라마적 내용이 중점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예측을 미리 한 덕이기도 하다. 즉, 애초에 보기 전에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인 듯하다. 그러나 너무 위에 기술한 전반 시퀀스가 너무 강렬해 이후의 장면들을 묻는 감은 없지않아 있다.
영화 자체는 시리즈의 전통과 (시리즈의 관점에서) 획기적 진행을 많이 섞는다. 아니, 전통이라는 말보다는 오마쥬라는 말이 더 맞겠다. 기관총을 쏘는 애스턴 마틴, 계속 쌓이는 본드의 마일리지(?) 등 마치 샘 멘데스 감독이 ‘옛날 007 영화들. 그땐 그랬지’라고 보여주는 것 같다. 멘데스 감독은 거기에 007 영화들로서는 다양한 신선한 시도를 한다. 영화의 거의 반이 영국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점과, 마지막에 저택에서 최후의 결투를 준비하는 본드와 M의 모습은 마치 서부극의 한 장면같다. (솔직히, 나는 나홀로 집에와 NCIS 시즌 5에서 셰퍼드 국장이 사망하는 장면 등이 더 떠오르더라)
영화를 보다보면, 제작진이 꼭 자아성찰을 하는 듯한 장면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스카이폴의 시점에서 이미 본드는 다양한 임무를 뛴 베테랑이고,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는 갓 007이 된 신참이었던지라 개연성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분들도 많은데, 이는 어차피 007 시리즈가 개연성은 이미 몇십 년전에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려 다 썩어 없어졌기 때문에 그닥 큰 문제는 안된다) 그와 M은 이제 MI6를 목표로 한 사이버 공격에 무력하게 당할 정도로 구식이 되었다. 온갖 컴퓨터 용어(의외로 많이 나온다)를 내뱉는 M의 비서 태너와 젊은 Q(흥미로운 것은, Q를 연기한 벤 위쇼는 엄청난 기계치라는 사실)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거나, 기밀 유출로 청문회에 소집된 M에게 국방부 장관이 “이제 잠입 요원에게 정보를 수집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는 장면 등은 꼭 시리즈 자체에 대한 자아성찰인 것만 같다.
스카이폴에는 나오미 해리스와 베레니스 말로히 두 명의 본드걸이 나오는데, 오히려 이 영화의 진정한 본드걸은 최고령 기록을 갈아치우신(?) 주디 덴치가 맡은 M이라 할 수 있다. 스카이폴은 어느 007 영화보다도 그냥 주변 인물에 불과했던 M을 거의 주인공급으로 비중을 높였다. 이로 그간 다뤄지지 않았던 본드와 M의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룬다. M을 노리는 실바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도 명연기를 펼친다. 여느 본드 악당과는 달리 M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좀 더 소박하지만, 현실적인 악역으로 그려졌다. M을 향한 광기나 이를 위해서라면 MI6 사이버 및 폭발 테러, 지하철 폭탄 테러 등 정말 뭐든 하는 성격 등은 정말로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좀 닮은 구석이 있다. 그 외에도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볼드모트로 분했던 랄프 파인즈가 SAS 출신 정보 위원회장으로 나와 호연을 했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스토리의 모든 면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페이스 빠른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 중반부가 느려지는 감은 없지않아 있고, 후반부로 가서 페이스가 빨라지다보니 약간의 스토리적 개연성을 포기하는 부분, 그리고 실바가 M에게 원한을 가진 이유 등도 너무 간단하게 몇 분 정도만 언급될 뿐, 좀 더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점 등은 아쉬웠다.
액션 장면이 좀 적긴 하더라도, 스카이폴은 볼거리가 충만하다. 특히 장면장면이 내 아이패드나 맥의 배경화면으로 쓰고 싶을 정도로 멋진데, 그 중 아주 밝은 곳을 배경으로 보이는 본드의 실루엣을 담은 다양한 장면들은 참으로 멋지다는 말밖에는 안 나온다. 그리고 제이슨 본이나 심지어 전작인 퀀텀 오브 솔러스도 가까이서 짧은 샷으로 정신없이 카메라 흔들어대면서(…) 현장감 있는 격투 장면을 찍는 경우가 많았는데, 스카이폴은 좀 더 느리고, 샷 하나하나도 길게 나오는 편이다. 이따금씩은 몰입도를 과도하게 떨어뜨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으나, 이런 차별성들이 나름 좋았다. 아델의 주제곡 Skyfall이 흐르는 오프닝 크레딧 또한 말을 안할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여자들이 나오는 007 오프닝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카지노 로얄의 오프닝 크레딧을 제일 좋아했으나, 이번 스카이폴이 그걸 바로 갈아치웠다. 그정도로 강렬했다.
사실 스카이폴을 보기 전에 포스트 준비 관계로 내가 2012년에 본 영화들 중 Top 5를 미리 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은 스카이폴이 이 순위 리스트에 난입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워낙 주변 평도 좋았으니까. (솔직히, 난입하기를 바랬던 것도 없지않아 있다) 예상대로, 스카이폴은 이를 난입했다. 그것도 상위권에.
올해로 007 시리즈는 50주년을 맞았다. 스카이폴에서 본드와 M은 시종일관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들이 믿는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이는 시리즈 자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다. 50년이라는 시간동안 007 시리즈의 영화들 23편이 나오면서, 세상은 변했다. 특히 세계 정세가 변했다. 시리즈 초기에 본드의 주적이었던 소련 등의 사상의 적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그 빈 자리를 국가적 크기가 아닌 단체적 크기의 테러리스트들이 메꾸고 있다. 실제로 요즘에는 007같은 첩보 요원들이 필요없는 것만 같다. 그와 함께 007 시리즈도 한물이 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카이폴을 통해, 질문은 던져진다. “과연 정말로 필요없는 것일까? 정말로 한물간 걸까?”
Score: 9.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