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되면 예상이 될 법도 하다. 아이폰 5가 12일 발표되고 나서, 언론들은 “혁신이 사라졌다”고 연신 기사들을 날리고 있다. 최근 애플 이벤트 이후의 기사들을 보면 진짜 오랫동안 그 말만 한 것 같다. 당장 최근 1년만 생각해봐도 아이폰 4S때도, 3세대 아이패드 때도, 그리고 WWDC 때도 그랬다. (아니 그럼 레티나 맥북 프로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는 우연찮게도 잡스가 암으로 사망한 직후라 “잡스가 없어서”라는 고인드립 아닌 고인드립도 성행했다.
하지만 아이폰 5 자체는 어떨까? 외신들의 평가를 보면, 정말 좋은 제품같다. 화면도 커졌고, LTE도 되며, A6 프로세서로 기존 4S대비 2배의 속도 향상을 이루었다. (그럼 내 4랑은 네 배 차이인가…) 무엇보다 결론적으로 그간 아이폰이 경쟁자들에게서 (객관적인 기능 세트에서) 없다고 하는 기능은 나름 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거 같다: 아이폰 5는 경쟁 제품의 기능을 따라잡은 것뿐이고, 혁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나쁜 것일까? 지금이야 삼성과의 소송전 이후의 나쁜 여론(이 있다면) 때문에 이 문제가 부각(?)되어 보이지만, 사실 애플이 따라한 것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고객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애플 자신의 고집으로 절대로 허용못한다(착탈식 배터리라던가, 5인치대 화면이라던가)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수용하지 않았지만, 만약에 그것이 대세라면 아무리 애플이라도 따라가야하지 않겠는가.
엄밀히 말하면, 맞다: 아이폰 5에 혁신은 없었다. 디자인 자체도 4/4S에서 좀 더 완성시킨 디자인일 뿐,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이 아닌 것은 맞다. LTE도 다른 안드로이드폰에 비하면 늦게 추가됐고(전세계적으로 LTE를 맞추기 위해 애플은 모델을 세 가지로 나눠야 했다), 화면도 여전히 다른 스마트폰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4인치가 딱 알맞다고 생각하지만 갤럭시 노트의 5인치대를 선호하는 분도 있으니…)
그러나 겨우 혁신의 정도로 제품을 평가하는 게 옳은 걸까? 아이폰은 출시 5년만에 애플의 전체 수익의 반을 차지하는 애플의 최대 사업 중 하나가 되었다. 애플의 최근 수직 상승은 아이폰 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007년 아이폰 발표 당시 80달러대의 애플 주식이 지금은 682달러다. 단 5년 사이에) 혁신의 나쁜 의미는 바로 위험 부담이다. 기존의 플레이북에서 뭔가 많이 바꾸면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크다. 혁신을 이루어낸다 한들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물론, 나중에는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당장에는 엄청난 쪽박이 될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에 애플에서 쫓겨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1984년의 첫 매킨토시도 그러했다. 아무리 혁신의 기업인 애플이라지만 언론과 여론에게 혁신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아이폰을 들어엎기에는 상당히 늦은 시기가 됐다. (그나저나, 혁신의 기준을 높인 것은 결국 애플 자신인 건 사실인 듯하다) 이제 아이폰은 안정기로 접어들었고, 애플도 이를 알기에 당장 극적으로 기기 디자인을 변경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잡스의 부재로 이 꼴이라 하시는 분들은 3GS 이후의 아이폰을 생각해보시라. 다 아이폰 5 수준의 덜하면 덜했던 변화점들을 보였다. 그리고 애플은 새로운 제품 카테고리를 소개할 때 혁신을 해내지만, 보통 그 이후 제품은 약간의 보수적 성향을 유지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애플의 혁신의 부족은 전반적 산업 자체의 분위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와이어드의 맷 호넌은 “아이폰 5는 엄청나게 놀라운 동시에 엄청나게 지겹다”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한다:
큰 관점에서 보면, 애플의 디자인적 피로는 애플의 경쟁사들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모두가 애플을 베끼려 들고 있다. (중략) 삼성의 거의 모든 폰과 태블릿, 그리고 HTC의 많은 모델도 상당히, 어,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중략) 그리고 이것도 있다: 그냥 스마트폰 자체가 지겨워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미래를 보았지만, 증강현실 안경이라던가 손목시계라던가 다 다른 기기들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만 벌써 인구 반 이상이 스마트폰을 쓴다. 얫날 피쳐폰이 그랬던 것처럼, 스마트폰은 필수품이 되었다. 보통 필수품이 되면 지겨워질 수밖에 없다. 그건 IT 산업의 섭리이다. 거기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의 모든 혁신을 애플이 해내기를 기대하는 기괴한 여론도 이러한 사태에 한몫하는 듯하다. 하다못해 삼성은 뭐 혁신하면 안되고, 계속 애플을 베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인가? (내가 싫어하긴 하지만, 갤럭시 노트는 삼성이 한 것치고는 혁신이라 생각한다. 다만 당시 이를 실행한 방법이 좀 많이 안습이었을 뿐이지)
혁신이 아니더라도 아이폰 5는 여전히 애플의 여전한 디테일을 볼 수 있는 스마트폰이다. 처음부터 완전히 재설계했다는 내부와, 45도 다이아몬드 세공으로 반짝이는 느낌을 더한 알루미늄 림, 뒷면의 투톤 디자인(특히 블랙 & 슬레이트는 정말…), A6 프로세서, 더 진화한 카메라 시스템까지. 혁신이 없더라도 아이폰 5는 이미 최고의 스마트폰이라고 하는 외신도 많고, 나도 동의한다. (이건 굳이 내가 맥, 아이폰, 아이패드의 삼위일체를 이룬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결론은 이거다: 아이폰 5는 멋진 스마트폰이다. 내가 현재 이 상황만 아니었어도 바로 샀을 것이다. 그리고 멋진 제품을 만드는 데 무조건 혁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혁신이 없어도, 이미 아이폰 5는 최고의 스마트폰 중 하나다. 혁신이 없더라도, 아이폰 5는 불티나게 팔려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