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ed Vogelstein
이 글은 Fred Vogelstein의 “And then Steve said, ‘Let there be an iPhone’“을 번역한 것이다.
캠벨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89km 정도의 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통근길 중 하나다. 그 길은 산타 크루즈 산맥의 동쪽 부분과 맞닿아 있고, 크고 보통 비어있는 후니페로 세라 프리웨이를 주로 쓴다. 여기는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 재벌이 자신의 페라리의 속도를 시험하는 것을 지켜보기에 딱 좋은 곳 중 하나고, 휴대 전화 신호가 더럽게 안 잡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앤디 그리그논 Andy Grignon에게는 2007년 1월 8일에 혼자 남아 생각을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이 길은 그가 출근할 때 쓰는 길은 아니었다. 그는 캠벨의 서쪽에 있는 도시인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에서 일한다. 그의 출근길은 12km 정도였고 늘 정확히 15분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그의 상사인 스티브 잡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는 맥월드 엑스포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을 볼 예정이었다. 애플 팬들은 몇 년 동안이나 잡스에게 아이팟에 휴대전화 기능을 넣어 두 기기를 다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게 해달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잡스는 그 바램을 이제 실현해주려 하고 있었다. 그리그논과 그의 동료들은 근처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10시에 —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 첫 번째 아이폰을 공개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그논이 북쪽으로 운전하는 동안, 그는 전혀 흥분되지 않았다. 그는 무서웠다. 실리콘 밸리의 대부분의 제품 시연은 미리 짜놓은 것이다. 인터넷이 끊기거나 휴대 전화 신호가 약한 것 때문에 시연을 망칠 필요가 있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잡스는 라이브 프리젠테이션을 고집했다.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이 시선을 확 끄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의 전설 중 일부는 바로 이러한 제품 시연 동안 절대로 눈에 띄는 결함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그논 같이 뒤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의 일부분은 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부여했다.
그리그논은 아이폰의 모든 라디오를 담당하는 책임자였다. 이것은 매우 큰 일이다. 휴대 전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게 많은 것을 해주지만, 기본적으로는 간단한 쌍방향 라디오일 뿐이다. 그리그논은 전화기가 전화기답게 굴 수 있는 장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아이폰이 전화가 안 걸리거나, 무선 네트워크나 블루투스 헤드셋에 연결을 하지 못했다면, 그리그논이 그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다. 아이폰의 초기 엔지니어 중 한 사람으로서, 그는 그의 인생의 2년 반 — 가끔씩은 1주일에 7일 — 동안 프로젝트에 매달려야 했다.
그리그논은 애플의 아이폰 리허설 팀의 일원 중 하나였고, 나중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모스콘 센터에 있는 프리젠테이션 장소에 있었다. 그는 잡스가 90분 가량의 쇼를 한 번의 문제 없이 끝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잡스는 5일동안 연습하고 있었지만, 아이폰은 리허설 마지막 날임에도 아직도 통화가 끊기거나, 인터넷 연결을 잃거나, 얼거나, 그냥 꺼졌다.
“처음에는 리허설에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습니다 — 일종의 신용 배지랄까요.” 그리그논이 말한다. 단 몇몇만이 리허설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빠르게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가끔씩 그가 이성을 완전히 잃는 것도 봤습니다만, 하지만 대부분은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매우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너 때문에 회사가 [검열] 망하게 생겼어’ 라던가, ‘만약에 우리가 실패하면, 그건 너 때문이야’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매우 격렬했죠. 그리고 저는 매우 작아보였고요.” 그리그논은 리허설에 있던 다른 사람들처럼 실제 프리젠테이션에서 결함이 발견된다면, 그는 그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데모를 수백 번은 했는데, 꼭 하나씩 제대로 동작이 안 됐습니다.” 그리그논이 말한다. “그건 별로 좋은 느낌이 아니었죠.”
프리젠테이션은 1급 비밀이었다. 목요일부터 그 다음 주말까지 애플은 모스콘을 완전히 장악했다. 무대 뒤에에는 가로세로 2.4m의 전기 연구실을 만들어 아이폰을 보관하고 시험했다. 그 옆에는 잡스를 위한 소파도 있는 휴게실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24시간 내내 그 방과 문들을 지키는 12명 이상의 보안 요원들을 배치했다. 잡스가 리허설을 진행하는 강당은 매우 소규모의 중역을 제외하고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잡스는 유출에 매우 집착해서 애플이 고용한 모든 청부업자들 — 부스에 있는 사람들과 조명과 음향을 담당하는 사람들까지 — 모두 프리젠테이션 전날에 건물에서 재우게 하려고 했다. 그의 참모들이 겨우 안 그래도 되도록 설득시킬 수 있었다.
그리그논은 아이폰을 공개하는 것이 그냥 보통 제품을 발표하는 것이 아닌, 아무도 얼마나 영향력이 큰 순간인지 모를 것이라고 믿었다. 7년동안 아이폰과 그 후계자 아이패드는 실리콘 밸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이 되었다. 그들은 답답한 휴대 전화 산업을 바꾸었다. 그들은 새롭고 매우 수익성이 좋은 소프트웨어 시장을 위한 플랫폼을 제공하기도 했다 — 2008년에 시작한 이후 100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냈다. 그리고 그들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컴퓨터 산업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데스크톱과 노트북의 판매 대수에 아이패드까지 포함시키면, 애플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큰 PC 제조사다. 작년에만 2억 대의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팔렸는데, 이는 전세계에서 판매된 차의 양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다.
아이폰의 영향은 경제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컸다. 애플의 혁신은 인간이 기계와 어떻게 소통하는 지에 대해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건 마우스 대신 손가락을 쓴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스마트폰들은 이제 우리 뇌의 연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정보를 받아서 처리하느냐의 방법론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다. 책, 신문, 전화, 라디오, 테이프 녹음기, 카메라, 비디오 카메라, 나침반, 텔레비전, VCR, DVD, 퍼스널 컴퓨터, 휴대 전화, 비디오 게임, 그리고 아이팟이 각각 가져왔던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스마트폰은 저 위에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주머니에도 들어간다. 그 기술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방식에,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에,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하고 탐험을 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고 있다.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또한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즐기고 있다.
그럼에도 애플은 공격을 받고 있다. 구글이 2007년에 안드로이드 — 그리고 세계의 휴대 전화 시장과 휴대 기기 시장을 점령할 계획 — 를 발표한 이후, 구글은 아이폰과 경쟁을 하려 한 것이 아닌,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성공했다. 안드로이드는 2010년 이후 엄청나게 성장했다.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안드로이드의 점유율은 80%를 넘었고, 애플은 20% 아래로 떨어졌다. 유사한 트렌드가 아이패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010년에는 90%에 달하는 점유율을 보였지만, 지금은 60% 이상이 안드로이드를 돌리고 있다.
애플 팬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어디로 향하는 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잡스가 2011년 10월에 세상을 떠났을 때, 대다수의 질문은 팀 쿡이 과연 잡스의 자리를 이을 수 있냐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가 그의 자리를 이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잡스가 애플을 경영했을 때, 애플은 3-5년마다 혁신적인 제품 카테고리를 하나씩 내놓는 혁신 기계였다. 그는 그의 전기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에게 또다른 제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TV의 혁신 말이다. 하지만 쿡 아래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고, 주주들 사이에 나오는 자신감의 부재는 눈에 띈다. 애플의 제품 발표 행사는 늘 회사의 주식을 올리게 하곤 했다. 9월에 쿡이 새로운 스마트폰인 아이폰 5c와 5s를 선보였을 때, 애플의 주가는 10%나 떨어졌다. 1년 전 애플의 주가는 702달러를 달리며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회사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으나, 지금은 거기서 25% 이상이 떨어진 상태다.
그 사람이 누구였던 스티브 잡스와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가 않다. 그리고 2년동안 애플의 수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쿡은 늘 잡스가 그에게 그가 회사를 잡스처럼 돌리는 게 아닌 쿡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얘기해왔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아이폰이 어떻게 태어났나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사람의 무분별한 요구 — 그리고 알 수 없는 힘 — 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 1월에 잡스가 아이폰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 얼마나 큰 도박이었는 지는 과장하기도 힘들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전화기 — 애플이 한 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 를 소개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을 겨우겨우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으로 하려 하고 있었다. 아이폰이 실제로 출시하기까지는 6개월 정도 남은 상태였지만, 그는 세상이 지금 당장 아이폰을 원하도록 만들고 싶어했다. 사실, 아직 해야할 일은 산더미였다. 생산 라인도 만들어져야 했다. 그 당시에는 100여대의 아이폰만이 존재했고, 그것들도 다 상태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것들은 화면과 플라스틱 모서리 사이에 거대한 틈이 있었고, 다른 것들은 화면에 흠집이 나 있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돌리는 소프트웨어는 버그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폰은 노래나 동영상의 일부분은 재생할 수 있었지만, 동영상 전체를 튕기지 않고 재생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 웹 서핑을 하면 괜찮았지만, 그 반대로 하면 작동이 안될 수도 있었다. 몇 시간동안 연구한 끝에 아이폰 팀은 특정적 기능 몇 가지를 특정한 순서로 해내면 전화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종의 “최적의 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잡스가 그 최적의 경로에 그대로 있는다 하더라도, 아이폰을 작동가능한 상태로 만들려면 다양한 막판 버그 수정을 해야 했다. 발표일에, 그리그논의 라디오를 돌리는 소프트웨어에는 아직도 버그가 있었다. 아이폰의 메모리를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거기에 잡스가 넣어야 한다는 추가적 전자 장치가 또 어떤 방식으로 아이폰을 망칠 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잡스는 데모용 전화기의 화면이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화면에 그대로 보여지기를 원했다. 큰 화면에 기기를 보여주려면, 다른 회사같으면 비디오 카메라를 썼을 테지만, 잡스에게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청중은 아이폰 화면 위에 그의 손가락을 볼 것이고, 그러면 그의 프리젠테이션의 용모에 해를 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애플 엔지니어들에게 몇 주 동안 무대에 오를 아이폰들의 뒷판에 추가적 기판과 비디오 케이블을 달도록 했다. 그 비디오 케이블은 프로젝터와 연결되어서, 예를 들어 잡스가 아이폰의 캘린더 아이콘을 터치할 때 그의 손가락은 나타나지 않겠지만, 큰 화면의 이미지는 그의 명령에 반응하는 것이다. 효과는 마법같았다. 청중들은 꼭 아이폰을 자신의 손에 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폰의 다른 거대한 문제점들을 생각할 때 그 셋업을 배치한다는 것은 시간낭비같았다.
아이폰의 와이파이 라디오의 소프트웨어는 너무 불안정해서 그리그논과 그의 팀은 전화기의 안테나를 연장시켜 무대 밖으로 빼내 무선 신호가 멀리 갈 필요가 없도록 했다. 청중들 또한 아이폰들이 사용하는 주파수를 써서는 안됐다. “베이스 스테이션의 ID가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 — 그 말인즉슨, 노트북이 와이파이 네트워크를 스캔할 때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청중에는 5,000명의 괴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그논이 말한다. “그들이라면 그 신호를 해킹할 방법을 알아냈을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해결책은 에어포트 소프트웨어를 약간 개조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구동하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와이파이는 미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주파수를 쓰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잡스가 계획하고 있는 전화 통화가 무대에서 제대로 연결될 수 있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적었다. 그리그논과 그의 팀은 그저 신호가 강하도록 해놓고, 기도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이폰의 통신사인 AT&T를 불러 휴대용 중계기를 설치하도록 해 신호 세기를 강하게 해놓았다. 그리고 잡스의 허락을 받고 전화기의 디스플레이에 신호 강도가 어떻게 되든 늘 다섯 개를 보이도록 프로그램을 해 두었다. 잡스가 전화를 하는 몇 분 동안 라디오가 갑자기 튕길 가능성은 적었지만, 90분의 프리젠테이션 동안 튕길 가능성은 적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라디오가 만약 튕겨서 재시작하면, 청중들이 그걸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그논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강제로 바 다섯 개가 계속 뜨도록 코드를 넣었죠.”
이러한 자잘한 편법들도 고칠 수 없는 아이폰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메모리가 너무 부족해서 몇 가지의 작업을 돌리고 나면 전화기를 재시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잡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대의 데모 유닛을 무대 위에 올려 놓았다. 아이폰 한 대의 남은 메모리 수치가 낮으면, 그는 그 아이폰이 재시작하는 동안 다른 데모 유닛으로 갈아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잡스가 계획한 데모의 양이 워낙 많아서 그리그논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 너무 많다는 걱정이 들었다. 12개의 기능 데모에서 하나라도 잘못되지 않는다면, 잡스가 같은 폰에서 동시에 아이폰의 다양한 기능을 시연하는 화려한 피날레에서는 재앙이 닥칠 것만 같았다. 그는 음악을 재생하고, 전화를 받고, 그 통화를 보류해두고 다른 전화를 받은 다음, 사진 하나를 찾아 두 번째 수신자에게 이메일로 보내고, 첫 번째 수신자를 위해 인터넷에서 뭘 찾은 다음, 통화를 모두 끊고 음악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저와 제 부하들은 모두 이것 때문에 매우 긴장했습니다.” 그리그논이 말한다. “우리는 각각의 전화기에 128MB의 메모리만 있었고” — 커다란 디지털 사진 24장 정도에 맞먹는 양이다 — “이 앱들 모두 개발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서 크고 메모리도 부풀려 있었죠.”
잡스가 이렇게 궁지에 몰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직원들을 어떻게 푸시하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지 아는 엄격한 감동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한 2차 계획을 구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이폰이 애플이 작업하고 있는 유일한 멋진 것이었다. 아이폰은 워낙 애플 내에서 많은 부서들이 작업한 프로젝트라 이 당시에는 백업 계획 자체가 없었다. “애플 TV 아니면 아이폰이었어요.” 그리그논이 말한다. “그리고 맥월드에 애플 TV 달랑 하나만 들고 갔다면” — 텔레비젼에 아이튠즈를 연결하는 신제품 — “세상은 ‘저거 뭐야?’라고 했겠죠.”
그의 경력에서 가장 커다란 순간이 내부에서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리그논은 속앓이를 심하게 했다. 2007년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경력의 전부를 애플이나 애플과 관련된 협력 업체에서 보냈다. 1993년에 아이오와 주립 대학에 있을 때, 그의 그의 친구 제레미 와일드 Jeremy Wyld는 뉴튼 메시지패드를 재프로그램해 무선으로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뉴튼은 제품으로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진정한 첫 번째 핸드헬드 컴퓨터로 생각하고 있고, 그들이 해낸 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한 것이었다. 결국 둘 다 애플에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 와일드는 뉴튼 팀에 배속됐고, 그리그논은 애플의 유명한 연구개발 부서 — 진보적 기술 그룹 Advanced Technologies Group — 에 배속되었다.
2000년에 그리그논은 전 애플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설립한 휴대 전화나 다른 작은 기기들을 위한 운영 체제를 만드는 픽소 Pixo에 취직했다. 픽소의 소프트웨어가 2001년에 출시된 아이팟에 탑재됐을 때, 그리그논은 다시 애플로 복귀했다.
그 때에는 픽소에서 일한 덕에 그는 화상 통화 기술 외의 두 가지 분야에 전문성을 쌓게 되었다. 바로 컴퓨터 라디오 송신기(와이파이나 블루투스)와 휴대 전화같은 작은 핸드헬드 기기의 소프트웨어가 동작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그논은 밸리 내에 있는 다른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거주하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한 것이었다. 대부분은 그들이 쓴 코드가 하드 드라이브에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거나 칩의 능력을 한계로 밀어붙이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스크톱이나 노트북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강력하고, 변경이 가능하며, 저렴했다. 메모리, 하드 드라이브, 그리고 프로세서마저도 저렴한 가격에 올릴 수 있었고, 이들은 외부 전원이 있거나 배터리가 거대했다. 그리그논의 구역인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에서는 하드웨어는 고정되어 있었다. 너무 큰 코드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작은 배터리 — 노트북을 몇 분 정도만 돌릴 만한 — 는 하루 종일을 버틸 수 있어야 했다. 2004년에 아이폰 개발 작업이 시작됐을 때, 그리그논은 프로젝트에 합류할 만한 완벽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2007년이 되자, 그는 감정적으로 지쳤다. 살이 23kg이나 쪘다. 그는 그의 스트레스를 결혼 생활에 풀었다. 아이폰 팀은 휴대 전화를 개발한다는 것이 아이팟이나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렸다. “매우 극적이었죠.” 그리그논이 말한다. “이것이 애플의 차세대 신제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모두의 머리에 완전히 박혀버린 듯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자존심을 가진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들을 매우 타이트하고 좁은 곳에 모여놨으니, 그 압박 내에서 미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죠.”
놀랍게도, 잡스는 애플이 전화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당해야 했다. 이는 애플이 아이팟을 2001년에 소개한 순간부터 내부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던 주제였다. 이론적 논법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비자들은 이메일, 전화, 음악 듣기를 모두 한 기기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세 대의 다른 기기를 다 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잡스와 중역들이 그 아이디어를 자세히 조사할 때마다, 이건 흡사 자살 미션인 듯했다. 전화기에 들어가는 칩과 대역폭이 휴대 전화 신호로 웹서핑을 하거나 음악이나 동영상을 받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메일은 넣어도 괜찮을 듯 했지만, 그것은 이미 리서치 인 모션의 블랙베리가 빠르게 시장을 선점해가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잡스는 어느 통신사와도 파트너 계약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통신사들이 휴대 전화 제조사와의 파트너십 계약에서 늘 갑이 되려고 했고, 그리고 망을 가지고 있으니, 늘 갑이 되었다. 유명한 통제광인 잡스로서는 그들에게 꿇을 수가 없었다. 애플은 2003년에 모토로라를 살까도 생각했으나, 임원들 모두 당시 회사에게는 너무 큰 인수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회사는 2년 뒤 협력을 했으나, 실패했다.)
2004년 가을이 되자, 통신사들과 사업을 하는 것이 옛날만큼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스프린트는 자신이 보유한 무선 대역폭을 판매하려 했다. 이 말은 이 대역폭을 사서 되팔면 애플은 통신사가 될 수 있다는 의미 — “모바일 가상 네트워크 사업자” — 였다. 애플은 전화기를 만들고 통신사들과 협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잡스가 이사로 있는 디즈니에서는 이미 스프린트와 자사만의 무선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잡스는 애플도 이 길을 쫓아야 할 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 2006년에 애플이 싱귤러(나중에 AT&T에 인수되었다)와 체결한 협상은 1년 이상이 걸렸지만, 애플이 기기를 만들기 위해 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팟의 성공에 취한 많은 임원들과 엔지니어들은 전화기를 만든다는 것은 작은 매킨토시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애플은 2005년과 2006년에 하나가 아닌 세 가지의 아이폰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 사람은 여섯 대의 다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능을 갖춘 완전히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팀에 있던 사람들 일부는 너무 힘들어서 첫 번째 아이폰이 발매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다. “흡사 첫 번째 달 미션 같았죠.” 프로젝트의 중요 임원 중 하나였던 토니 파델이 말한다. (그는 이후 2010년에 자신만의 회사인 네스트 Nest를 창업했다.) “프로젝트의 몇 가지 미지의 요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익숙했지만, 여기에는 너무 새로운 것이 많아서 꽤나 놀랐죠.”
잡스는 아이폰에 모든 맥에 탑재되어 나오는 OS X의 개조된 버전을 올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무도 휴대 전화용 칩에 OS X같은 거대한 프로그램을 얹어본 적이 없었다. 소프트웨어의 크기를 원래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여야 했다. 몇백만 줄에 달하는 코드를 날리고 다시 써야 했고, 엔지니어들은 칩 속도와 배터리 소모를 시뮬레이션으로 돌려야 했다. 아이폰에 올라갈 칩이 2006년에나 생산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멀티터치 정전식 터치 스크린을 소비자용 제품에 탑재한 적 또한 없었다. 정전식 터치 기술 — 손가락이나 다른 전도체가 “터치”를 함으로써 회로를 완성시키는 기술 — 은 1960년대부터 있던 기술이었다. 두 개 이상의 손가락을 동시에 써도 각각의 손가락을 따로 인식할 수 있는 정전식 멀티터치는 훨씬 더 복잡했다. 1980년대에 연구가 시작된 기술이었다. 그러나, 애플이 아이폰에 탑재한 터치 스크린을 대량으로 생산한다는 것은 웬만한 회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음 단계 — 자동 수정 기능이 있는 가상 키보드를 만들며, 사진이나 웹 페이지를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된 기술을 유리 아래에 투명하게 넣는다는 것 — 는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것조차 매우 비쌌다. 오직 몇 개의 생산 라인만이 멀티터치 정전식 터치 스크린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소비자 가전 기기의 터치 스크린은 손가락이나 스타일러스로 누르는 감압식이었다. (팜 파일럿이나 팜 트레오같은 후속 제품들이 이 기술을 쓴 대표적 제품들이었다.) 멀티터치 아이폰이 만들기 쉬운 것이라 했다 치더라도, 애플의 임원들은 탭하여 확대하는 기능이나 스크린에 띄워지는 가상 키보드가 과연 소비자들이 원하는 향상점인 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이르면 2003년에, 애플의 일부 엔지니어들이 멀티터치 기술을 태블릿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스티브는 화장실에서 이메일을 읽을 수 있는 기기를 원했어요 — 그게 제품 사양의 범위였죠.” 그 프로젝트의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던 조슈아 스트릭턴 Joshua Strickton이 말한다. “하지만 집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있을 만큼의 배터리 수명을 보장하지 못했고, 유용한 기능을 넣을 만한 그래픽 기술을 가진 칩도 없었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만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3년에 애플에 취직하기 전, 스트릭턴은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석사 논문으로 멀티터치 기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애플에서 그와 그의 동료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이 기술로 뭘 할 지 알지 못하는 듯한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본 그는 애플이 그 기술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2004년에 회사를 떠났다.
당시 애플의 높은 직위의 임원 중 한 명이자 멀티태치 옹호론자였던 팀 부처 Tim Bucher는 그들이 시험하던 기기들이 손가락이 아닌 마우스에 최적화된 OS X이었던 것이 문제의 일부분이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11-12인치 화면에 맥 미니의 사양을 가져다 썼죠… 그러고는 데모 앱을 열어 다양한 멀티터치 제스쳐를 하는 겁니다. 그 데모 중 하나는 아래에서 키보드가 슬라이드되어서 올라오는 겁니다 — 2년 뒤에 아이폰에 탑재된 것과 비슷한 것이었죠. 하지만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문제가 생기면 계속 그 위에 갖다붙이는 상황이었죠.”
일부는 멀티터치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전화기를 만들자는 생각도 했는데, 잡스도 2005년에 들어 그 아이디어를 본격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는 말했죠. ‘토니, 이리 와봐. 이게 요즘 우리가 만들고 있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이걸로 전화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파델이 잡스가 가지고 놀던 데모 기기를 기억하며 말한다. “그건 거대했습니다. 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죠. 프로젝터가 천장에 붙어 있고, 거기서 맥의 화면을 가로 세로 1m 정도의 정사각형 지역에 투영하는 겁니다. 그러면 맥 화면을 만지면서 움직이고, 그릴 수 있었죠.” 파델은 터치 스크린 프로토타입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많은 내용을 들은 건 아니었다. 그것은 맥 제품이었고, 그는 아이팟 부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리에 앉아 그것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눴습니다 — 그걸로 뭘 할 수 있는 지도요.”
파델은 그렇게 거대한 프로토타입을 줄여서 생산을 한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그는 스티브 잡스에게 안된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을 더 잘 알았다. 첫 아이팟을 만들기 위한 자문 자격으로 2001년에 애플에 들어온 회사의 슈퍼스타 중 하나였던 그는 어려운 기술적 문제에 소심하게 대처하는 것으로 그 위치까지 오른 것이 아니었다. 2005년 들어, 36세였던 그는 아이팟 판매가 폭발하면서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임원이 되었다.
“어떻게 해낼 수 있을 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파델이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방을 가득 채운 이 특별한,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장비를 가지고 작은 휴대 전화 크기의 기기를 비용면과 신뢰성면에서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죠.” 해야할 일 목록은 생각만 해도 지칠 정도였다. “이러한 기술을 유리에 접합할 수 있는 LCD 생산업체를 찾아야 했고, 그 생산 라인에서 시간을 얻어내서, 화소 전자 기기가 터치 스크린 — LCD 위에 위치한 — 에 노이즈를 일으키지 않도록 상쇄와 조정 알고리즘을 적용해야 했죠. 프로젝트 전체가 그냥 터치 스크린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였던 겁니다. 두 세가지의 다양한 시도 끝에 결국 동작하는 터치 스크린을 대량으로 생산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OS X을 줄이는 것과 멀티터치 화면을 만드는 것은, 혁신적이고 어렵지만, 애플이 기업으로서 마스터한 실력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OS X의 디자인을 다시 생각하는 데 애플만큼 적임자가 없었다. 애플은 LCD를 모든 노트북과 아이팟에 넣기 때문에 LCD 제조업체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휴대 전화의 물리학은 완전히 다른 분야였고 2006년에 아이폰의 개발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그 분야에 대해서 모르는 지 절실히 깨닫게 했다. 애플은 아이폰의 안테나를 시험하기 위해 시험실과 장비들을 구비했다. 뇌의 밀도와 유사하게 하기 위해 끈적끈적한 것이 가득 찬 사람의 머리의 모형을 만들어서 전화기를 사용함으로써 사용자들이 얻을 수 있는 전자파의 양을 측정했다. 당시 높은 직위의 임원 중 하나는 아이폰을 개발하는 데 1억 5천만 달러 정도가 들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잡스는 최종 공개한 것과 유사하게 OS X을 구동하고 터치 스크린을 장착한 아이폰을 내놓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2005년에 그는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릴 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애플의 첫 아이폰은 잡스가 진짜 아이폰을 발표할 때 보여준 농담 슬라이드에 있던 것과 비슷했다 — 아이팟에 로터리 다이얼이 있는 거 말이다. 프로토타입은 정말로 아이팟에 휴대 전화 라디오를 달고 아이팟 클릭 휠을 다이얼러로 쓰는 방식이었다. “시장에 진입하기는 쉬운 방법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기만큼 멋진 것은 아니었죠.” 그리그논이 말한다.
2006년에 만들어진 두 번째 프로토타입은 잡스가 소개하게 될 것과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다. 터치 스크린과 OS X을 차용했지만, 기기 전체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 잡스와 애플의 디자인 수장인 조나단 아이브는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들 둘 다 전파의 물리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아름다운 벽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전파는 금속을 잘 관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저와 루벤 카바예로 Rubén Caballero — 애플의 안테나 전문가 — 는 회의실에서 잡스와 아이브에게 전파가 금속을 관통하게 할 순 없다고 설명해야 했습니다.” 2008년에 애플을 떠난 엔지니어 필 커니 Phil Kearney가 말한다. “그리고 그 설명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디자이너들의 대부분은 아티스트입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은 과학 수업은 8학년(한국으로 치면 중2 – 역주)때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플 내에서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냥 작은 틈을 만들어서 전파가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면 되지 않아?’라고 물으면 왜 그렇게 하면 안되는지 일일이 설명해야 했죠.”
애플의 가장 높은 하드웨어 임원이었던 존 루빈스타인 Jon Rubinstein은 전화기의 크기를 얼마 정도를 하느냐를 두고 오랜 기간동안 토론이 이어졌다고 말한다. “저는 두 가지의 크기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 표준적인 크기의 아이폰과, 더 작은 사이즈의 아이폰 미니를 말이죠. 아이팟처럼요. 하나는 스마트폰이 되고, 하나는 덤폰 dumbphone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모델은 별 호응을 얻지 못했고, 이러한 프로젝트를 하려면 하나에 집중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폰 프로젝트는 너무 복잡해서 회사 전체를 완전히 탈선시킬 수도 있었다. 회사의 많은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프로젝트에 빨려들어가 다른 일을 매우 더디게 진행하게 만들었다. 아이폰이 실패작이었거나, 개발을 아예 완료하지 못했더라면, 애플은 오랜 기간 동안 발표할 제품이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더 나쁘면,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들이 회사를 떠날 수도 있었다고 프로젝트의 임원은 이야기한다.
이러한 기술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잡스의 비밀에 대한 집착 덕분에 수백 명의 엔지니어들과 디자이너들은 1주일에 80시간을 아이폰 개발에 쏟아붓고도 누구에게도 그들이 무슨 제품을 개발하는 지 말할 수 없었다. 만약에 바에서 친구에게나, 배우자에게 얘기했다는 것을 애플에게 들켰다간 바로 해고였다. 어떤 경우에는, 매니저가 팀에 들어오겠냐고 묻기 전부터 비공개 계약에 먼저 서명해야 했다. 그러고는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을 듣고 나서는 비공개 계약에 서명했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약서에 또 서명해야 했다. “우리는 ‘파이트 클럽‘이라고 되어 있는 표지판을 보라색 기숙사 앞에 놓았습니다.” — 아이폰 건물 — “파이트 클럽의 첫 번째 법칙이 파이트 클럽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거든요.” 작년 10월까지 iOS 소프트웨어를 지휘했고, 2012년에는 애플 대 삼성 소송에서 증언까지 했던 스콧 포스털 Scott Forstall의 말이다. “스티브는 유저 인터페이스 개발은 외부인에게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저에게는 회사 내에 있는 누구든 데리고 와도 좋다고 했습니다.” 포스털이 말했다. “그래서 전 그들을 제 사무실로 불러서, 앉혀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지금 있는 곳에서 슈퍼스타다.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뭐라고는 얘기하지 못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밤과 주말을 모두 반납해야할 것이고, 지금까지 너희 인생에서 일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해야할 것이라는 것만 말해줄 수 있다.’”
초기 아이폰 엔지니어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발표한 다음날 부품 업체들의 반응이었어요.” 와이파이 라디오 칩을 만든 마벨이나 블루투스 라디오 칩을 제공한 CSR 같은 대기업들은 그들의 부품이 전화기에 사용될 것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들은 새로운 아이팟에 들어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가짜 설계도와 가짜 디자인까지 준비해뒀죠.” 엔지니어가 말한다. 그리그논은 애플의 직원들이 특히 싱귤러로 출장을 갈 때는 다른 회사의 직원인 것처럼 연기했다고도 했다. “접수 데스크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애플 배지가 여기저기 붙어있는 것을 보이게 하면 안되기 때문이었죠.”
잡스의 비밀에 대한 집착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은 바로 회사의 캠퍼스에 있는 아이폰 개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절대로 갈 수 없는 비밀 구역들이었다. “스티브는 이런 것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그논이 말한다. “그는 구역으로 나누는 것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여기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검열] 먹어‘였습니다. 사내에서는 누구나 누가 락 스타인지 알 것이고, 그들이 여러분 구역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여러분은 들어갈 수 없는 유리문 뒤의 거대한 방에 간다면, 그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죠.”
심지어 프로젝트 내에 있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전자 쪽을 설계하는 엔지니어들은 소프트웨어를 볼 수도 없었다. 전자회로를 테스트하기 위해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면, 그들은 진짜가 아닌 대리 코드를 받았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었다면, 시뮬레이터로 하드웨어 성능을 시험했다.
그리고 잡스의 내부 원 밖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빌딩 2의 1층에 있는 조나단 아이브의 구역을 방문할 수 없었다. 아이브의 프로토타입을 지키는 보안은 매우 엄격해서 일부 직원들은 인가되지도 않았는데 들어가려 하면 배지를 확인하는 사람이 경비를 부른다고 믿었다. “이상했죠, 거기를 지나치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요. 로비에 거대한 금속성 문이 있었는데, 이따금씩 문이 열려 있으면 안에 뭐가 있나 보려고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죠.” 대학교에서 졸업하자마자 아이폰 개발에 뛰어들은 엔지니어가 말한다. 포스털은 일부 연구실은 배지를 네 차례나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잡스의 기한에 맞추는 것 또한 매우 격렬해서 어떠한 토론도 결국 서로 소리를 지르며 끝났다. 지친 엔지니어들은 일을 그만뒀다 — 그러고는 며칠 뒤에 부족한 잠을 조금 보충하고 돌아왔다. 포스털의 참모였던 킴 보라스 Kim Vorrath는 한 번은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문이 박혀 열 수가 없었고, 결국 동료들이 그녀를 구출하는 데만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우리 모두 그걸 지켜보고 있었죠.” 그리그논이 말한다. “생각해보면, 일부분은 재밌습니다. 하지만 한켠으로는 이 모든게 얼마나 [검열]같은 지 상기하게 했죠.”
2007년 1월 9일에 잡스가 아이폰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그는 “오늘은 제가 지난 2년 반 동안 기다려온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는 청중에게 왜 사람들이 휴대 전화를 싫어하는 지 재밌게 설명했다. 그러고는 그가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했다 — 당연히.
그리그논과 다른 애플 직원들이 긴장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잡스는 아이폰으로 음악을 재생하고 전화기의 아름다운 화면을 뽐낼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는 주소록과 음성 사서함을 재발명했다고 말하며 전화 통화도 했다. 그는 터치 스크린 키보드가 얼마나 사용하기 쉬운지를 설명하며 문자와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많은 사진들을 훑으면서 두 손가락을 늘이거나 오므리면 사진을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는 것도 보여줬다. 그는 뉴욕 타임즈와 아마존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아이폰의 웹 브라우저가 그의 컴퓨터에 있는 것만큼이나 좋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구글 지도를 이용해 스타벅스를 찾아서 — 그리고 그는 무대에서 바로 스타벅스로 전화를 걸었다 — 아이폰을 가지고 있으면 길을 잃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보여줬다.
모든 게 끝나고 나서, 그리그논은 안심이 됐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술에 취했다. 그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스코치 한 병을 가져온 터였다. “우리는 — 엔지니어, 매니저, 모두 — 다섯째 줄쯤엔가에 앉아서 데모의 부분이 끝날 때마다 스코치를 한 잔씩 마셨습니다. 대여섯 명 정도였던 우리는 각자가 맡았던 파트의 데모가 끝날 때마다 샷을 마셨죠. 피날레가 오자 — 모든게 전에 그랬던 것처럼 완벽히 동작하자 — 우리는 병을 비워버렸습니다. 그건 우리가 본 데모 중 가장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날의 나머지는 아이폰 팀에게 완전히 광란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전체를 술 마시는 데 썼습니다. 난장판이었지만, 기분은 좋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