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이긴 하네.
제목: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Doctor Strange in the Multiverse of Madness
감독: 샘 레이미
출연: 베네딕트 컴버배치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 엘리자베스 올슨 (완다 막시모프 / 스칼렛 위치), 베네딕트 웡 (웡), 소치 고메즈 (아메리칸 차베즈)
(참고: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해보겠지만, 아주 스포일러가 없다는 보장은 못할 듯하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멀티버스의 가능성을 연 뒤로,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향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덕분에 루머가 미친 듯이 나돌았다. 심지어 톰 크루즈가 다른 유니버스의 토니 스타크로 나온다는 루머까지 있을 정도였다. (톰 크루즈는 MCU 최초의 영화인 “아이언맨” 제작 당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고용되기 전 토니 스타크 역으로 고려된 적이 있다) 내가 예시로 얘를 든 이유는 대충 아실 거라 본다. 그만큼 허무맹랑한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멀티버스라는 이 대주제는 결국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겪고 있는 개인적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의 재료에 불과하다. 우리 인생에서 늘 “이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멀티버스는 그 개념의 재료로 쓰인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느 세계에서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타노스를 무찌르고 자신을 희생한 영웅이 되어 있기도 하고, 다른 세계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타락해버린 시니스터 스트레인지가 되어 있다. 이 다른 세계관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MCU라는 세계관의 스트레인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가 결국은 주요 줄거리다.
일단 다양한 멀티버스의 스트레인지를 연기해야 했던 배네딕트 컴버배치도 그렇지만, 사실상 또 다른 주연인 스칼렛 위치는 어떨까. 사실 스칼렛 위치가 이번 영화에서 차지하는 역할 자체가 스포일러라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지만, 스칼렛 위치의 플롯상의 위치(…)는 어떻게 보면 닥터 스트레인지의 완전한 대척점이라는 말만 해두겠다. 엘리자베스 올슨의 MCU 경력에서 두 손가락에 들 만큼의 신들린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다. 다른 손가락은? 당연히 “완다비전”이지. 트위터에서 제목을 “스칼렛 위치: 대혼돈의 멀티버스”라고 바꿔야 할 정도라고 주장하는 걸 봤는데 그 정도까지 인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존재감 하나는 죽여준다.
다만 기존의 MCU 영화들에 익숙하고, 이러한 느낌을 좋아하셨다면,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제목 그대로 혼돈일 수도 있다. 일단 감독인 샘 레이미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 3부작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래는 “이블 데드”와 같은 B급 호러 전문 감독으로 유명했었다.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스파이더맨 3부작보다는 레이미의 전문 분야에 좀 더 가까운 모습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MCU의 전체적 기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아, 그리고 출신답게 일부 장면은 생각보다 섬뜩하고 잔인하다고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어느 정도 주의를 요한다고나 할까. 역시 공포 영화의 명장 다운 장면 배치가 일부 보인다. 물론 “MCU의 첫 공포 영화”라고 홍보한 것 치고는 좀 순한 맛이긴 했지만.
마블은 사실 MCU 초반에 이러한 감독의 취향을 철저히 묵살하는 정책을 일관했던 적이 있다. 물론 30편에 달하는 영화들과 드라마들이 하나의 세계관에 있으려면 어느 정도 중앙에서 제어하는 게 필요하긴 하지만, 정도가 과했다는 비판이 많았었다. (대표적으로 “토르: 다크 월드”는 원래 “원더우먼”의 감독인 패티 젠킨스가 감독을 맡았다 이러한 크리에이티브적 관점의 차이로 하차했었고, 주연이었던 나탈리 포트만은 공개적으로 마블에게 불만을 표하기도 했었다) 그런 비판을 의식한 건지 기존의 어벤져스처럼 대규모 팀업 영화를 자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페이즈 4에 들어서는 감독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페이즈 3에도 감독인 타이카 와이티티의 코믹적 입맛이 듬뿍 들어간 “토르: 라그나로크”가 있었다. 작년에 개봉한 클로이 자오 감독의 “이터널스”도 그랬고)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기존의 MCU 영화들에 길들여진 일반 관객들에게는 도리어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특히 특정 장르영화를 표방하는 상황이면 더더욱 그런 것 ㄱ타다.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초기 반응들이 영 시원찮은 이유도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노 웨이 홈”은 멀티버스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전 스파이더맨들과 빌런들이 모두 총출동하는 등 팬들이 기대하던 요소들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아낌없이 퍼부었다. 당연히 앞에 얘기한 대로 엄청난 기대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멀티버스라는 주제의 활용 범위에 상대적으로 많은 제한을 걸어버린다. 사실 그런 팬 서비스와 오마주만 계속하다 보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건 당연지사이며, 실제로 그렇게 많이 뺀 상황임에도 중간에 그런 팬 서비스 때문에 이야기가 산을 갈 뻔하기도 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이나 분위기를 봤을 때 그 선택이 맞았다고 본다. 하지만 관객들이 기대한 것과는 영 다른 영화가 나와버린 것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관객들의 기대가 이상한 방향의 기대였던 게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개봉 순서가 이상했던 것은 맞다.
(루머에 따르면, 원래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먼저 개봉하고 그 다음에 “노 웨이 홈”이 개봉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타임라인 순서도 그러했고, 원래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쿠키 장면에 스파이더맨이 도움을 청하러 오는 장면이 삽입될 예정이었다고. 물론 어디까지나 루머이긴 하지만, 영화 전반적으로 “노 웨이 홈”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는 것이나, “노 웨이 홈”의 쿠키 장면을 “대혼돈의 멀티버스” 예고편으로 땜빵한 걸 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마블이 이렇게 쿠키 장면으로 다음 영화 예고편을 넣은 건 “퍼스트 어벤져”의 쿠키로 “어벤져스” 예고편을 넣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마블이 이렇게 감독들의 개인적 취향을 반영해주기 시작한 것은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록 MCU 영화가 정형화되는 것을 피하고, 다양한 장르를 구축할 수 있게 될테니까 말이다. 다만 그러한 감독들의 입김과 MCU 영화로서 사람들이 가지는 기대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마블이 그 균형을 아직 찾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다.
P.S) 영화 개봉 이전에 뭘 봐야 하네라는 의견들이 많이 떠돌았는데, 결국 무조건 봐야 하는 것은 “완다비전”이다. “완다비전”을 안 보면 이 영화에서 스칼렛 위치를 보며 “계속 이러시는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니에요”만 되뇌게 될 거다. 그리고 시간이 좀 나시면 “닥터 스트레인지”나 “왓 이프…?”의 1화와 4화 정도를 챙겨보시면 되겠다. 사실 “대혼돈의 멀티버스”만큼 다른 MCU 콘텐츠를 볼 필요가 적은 영화도 흔치 않은 것 같다.
P.S 2) 스칼렛 위치는 이번 영화를 통해 MCU에서 가장 불쌍한 히어로 원톱 자리를 공고히 했다.